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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

국가지정문화유산


양주 회암사지 1
양주 회암사지 2
양주 회암사지 3
양주 회암사지 4
양주 회암사지
추천수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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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숙왕 15년(1328)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인도의 승려 지공이 처음 지었다는 회암사가 있던 자리이다. 그러나 회암사가 지어지기 이전에도 이 곳에는 이미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전기에 이색(李穡)이 지은 “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 의하면, 고려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 나옹이 “이곳에 절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번성한다.”는 말을 믿고 절을 크게 짓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조선 전기까지도 전국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고 하는데,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이면서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를 이 절에 머무르게 하였고,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다.

성종 때는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명에 따라 절을 크게 넓히는데 13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 후 명종 때 문정왕후의 도움으로 전국 제일의 사찰이 되었다가, 문정왕후가 죽은 뒤에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절이 불태워졌다. 이 절이 있던 자리에서 500m 정도 올라가면 지금의 회암사가 있는데, 그 부근에는 중요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고려시대에 세운 나옹의 행적을 새긴 회암사지선각왕사비(보물 제 387호)를 비롯하여, 지공의 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49호), 회암사무학대사홍융탑 (보물 제 388호)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있다. 이 사찰은 평지가 아닌 산간지방에 위치하면서도 평지에 있는 절에서 볼 수 있는 남회랑을 만든 점에서 고려시대의 궁궐이나 사찰 배치형식을 보이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 절을 창건한 것은 고려 충숙왕 15년(1328) 원(元)나라는 거쳐 들어온 인도 승려 지공(指空)으로 전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사찰이 있던 곳으로 추측된다. 조선 초 목은 이색 (牧隱 李穡)이 쓴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岩寺修造記) 에 의하면, 고려 우왕 2년 (1376) 지공의 제자인 나옹이 스승의 ‘삼산양수지기(三山兩水之記)의 비기(秘記)’ 즉 이곳에 가람을 이룩하면 불법(拂法)이 흥한다는 믿음에서 크게 불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가 완성하지 못하고 입적한 후 제자 각전(각전) 등이 262칸에 거주인수가 3,000명에 이르렀으며, 조선 초기까지도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절이었다.

이용안내

입장료: 없음
주차시설: 없음
부대시설 및 편의시설: 회암사지 해설 : 865-4080 (화~일, 10:00~17:00, 동절기 탄력운영), 중국어 해설 가능
장애인 시설: 없음
기타 관광정보 및 외국어 안내 서비스: 중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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