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중앙일보] 나무와 새, 아이와 가족...삶도 그림도 '심플'을 추구했던 한국근현대미술의 거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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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심플하다. 때문에 겸손보다는 교만이 좋고, 격식보다는 소탈이 좋다. 적어도 교만은 겸손보다는 덜 위험하며, 죄를 만들 수 있는 소지가 없기 때문에, 소탈은 쓸데없는 예의나 격식이 없어서 좋은 것이다.” (1974년에 쓴 글 '새벽의 세계'중에서)
삶도 심플했다. 돈도, 명예나 지위도, 도시의 편리함도 관심에 없었다. 40대 중반에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를 그만뒀다. 몇 해 뒤 서울을 떠났다. 전기도, 포장도로도 없던 경기도 덕소에 소박한 화실을 마련해 직접 밥을 지어먹으며 그림에 몰두했다. 12년에 걸친 '덕소시대'(1963~1974)의 시작이다. 이후 주변이 번잡해져 서울 명륜동 집에 돌아왔지만 다시 6년만에 수안보(1980~1985)에서, 이어 현재 용인시로 불리는 신갈(1986~1990)에서 낡은 농가를 찾아 화실로 삼아 그림에 몰두했다.
그 중 '자화상'(1951)은 한국전쟁 시기에 그린 대표작이다. 피난지 부산에서 지독히 혼란스런 나날을 보내던 그는 충남 연기군의 고향집을 찾고서야 비로소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자화상'도 그렇게 나왔다. 멋들어진 연미복 차림에 콧수염까지 근사한 남자가 화려한 도시가 아니라 황금빛 들판의 외길에 서있는 모습이다. "자연 속에 나 홀로 걸어오고 있지만 공중에선 새들이 나를 따르고 길에는 강아지가 나를 따른다. 완전 고독은 외롭지 않다." 생전에 이 그림에 대해 그가 남긴 말이다.
또 다른 대표작 '가족도'(1972)도 있다. 그림에 몰두하느라 가족과 떨어져 지내기 일쑤였고, 가족의 생계마저 뒷전이었지만 가족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애정은 숱한 작품에 거듭 드러나곤 했다.
1917년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며 전국단위 학생미술대회에서 최고상을 거듭 수상, 일찌감치 재능을 드러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화가의 길을 결심, 일본 유학을 다녀와 해방을 맞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직,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직을 거쳤다. 그가 생업을 그만두고 그림에 몰두하자 아내 이순경 여사는 서울에서 서점 '동양서림'을 운영하며 가족의 생계를 꾸리는 한편 매주 덕소의 화실을 찾아 남편을 뒷바라지했다. 지난 26일 열린 기념전 개막식에서는 올해로 97세를 맞는 이순경 여사에게 참석자들의 축하가 쏟아졌다. 그는 "장선생 덕에 제가 호강을 한다"며 미소를 지었다. 원로조각가이자 서울대 시절 사제관계로 처음 만난 최종태 선생은 "장욱진은 일본을 통해 20세기 서양미술을 접했으면서도 일본풍도, 서양풍도 아닌 '천진한 형태'로 우리 민족의 얼을 담아낸 20세기 미술사의 보기 드문 사례"라고 거장을 기렸다.
장욱진은 그림에 더해 후세에 귀중한 자취를 곳곳에 남겼다. 그가 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로 '장욱진 가옥'도 그렇다. 낡은 한옥을 손봐 화실로 삼았던 그는 그 옆에 자신의 그림에 곧잘 그렸던 대로 뾰족지붕의 소박한 양옥을 직접 지었다. 이곳에서는 탄생 100주년 기념 드로잉 전이 열리고 있다. 유족들이 유품을 정리하다 최근 발견, 처음 공개하는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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