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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해리성 장애,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현실의 그림자
내용 얼마 전 국내 한 중학생이 자신이 다니던 학교에 부탄가스 방화를 잇따라 시도한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던졌다. 이 학생은 평소 교우관계가 원만치 않고 공격적 언행을 하는 등 인격장애 증상을 꾸준히 보였음에도 교육 당국이 별다른 관리나 조치를 취하지 않다 화를 키운 것으로 조사됐다. 문제의 학생이 앓아 온 인격장애 증상은 ‘해리성 장애’인 것으로 진단됐다. 타협은 모르는 채 편가르기를 일삼는 정치권 사람들의 상대를 향한 막말에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정신 증후군의 이름. 해리성 장애란 과연 어떤 병일까.

‘위대한 독재자’ ‘본아이덴티티’ ‘롱키스굿나잇’ ‘파리텍사스’ ‘너스베티’ ‘엑스맨 최후의 전쟁’…. 이들 영화의 공통점은 ‘해리성 장애(解離性 障碍, dissociative disorders)’가 소재라는 것이다. 해리성 장애는 영화와 드라마의 단골 소재다. 국내에서도 ‘킬미힐미’ 등 해리성 장애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심심찮게 선보여 왔다. 해리성 장애는 감정 행동 생각 사건에 대한 기억과 연관된 의식이 분리, 통합돼야 할 사건이나 정보가 단절되는 현상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에 따르면 해리성 장애는 19세기에 처음 기술됐고 이때는 히스테리 증후군의 일부로 여겨졌다. 해리성 장애가 대중들에게 각인된 결정적 계기는 세계 1,2차 대전이다. 잔혹한 전투를 경험한 전투병들 사이에서 기억상실을 호소하는 이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전쟁이나 재난과 같은 특정한 사고를 당했을 때 해리성 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미국의 퇴역군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들의 5~20% 정도는 전투중 기억상실증을 경험한 것으로 조사됐다. 해리성 장애가 영화와 드라마에 단골소재가 된 가장 큰 이유는 질환 자체가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라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말한다.


심리적 충격으로 과거기억 상실

영화를 통해 해리성 장애의 특징을 살펴보자. 자신의 과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만다 케인은 8년 전 케이틀린이란 딸을 난 후 기억만이 존재한다. 평범한 시골의 주부인 그녀는 유치원 교사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머리에 충격을 입고, 괴한이 자신의 집에 들어온 사건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과거에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이었음을 알게 된다. 지나 데이비스가 열연한 영화 ‘롱키스굿나잇’의 줄거리다. 여주인공 케인은 해리성 장애 중 ‘해리성 기억상실’에 해당된다. 그런데 보는 이를 의아하게 만들 수 있는 대목이 영화 속에 나온다. 케인은 분명 과거 기억을 상실했는데 딸을 납치한 이들을 상대로 총과 칼을 자유자재로 쓰는 킬러로 변신한다. 영화가 허구일까. 박한선 성안드레아 신경정신병원 과장은 “해리성 기억상실에 걸려도 과거에 습득한 일반적 지식과 특정한 기계를 다루는 방법, 운전법 등에 대한 기억은 그대로 남아 있고, 새로운 것을 습득하는 능력도 유지 된다”고 말했다. 킬러본색이 드러난 것은 영화 속 허구가 아니라는 말이다. 박 과장은 “해리성 기억상실은 여성에게 많이 나타나기에 주인공을 여성으로 설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해리성 기억상실은 갑작스럽게 나타나지만 회복 또한 갑작스럽게 이뤄질 수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머리를 어딘가에 부딪친 후 갑자기 기억이 돌아오는 장면이 종종 등장하는 것도 이런 측면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김한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행복드림의원 원장)는 “해리성 기억상실은 흔히 몇 시간 또는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해리성 기억상실은 “억압과 부정 등 심리적 기전을 사용해 견디기 어려운 기억을 의식에서 제거하는 행위”라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말한다. 학대나 폭력, 전쟁과 재난처럼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을 때 인간은 방어기제로 해리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과는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서정석 건국대충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꾀병, 거짓 등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는 행위와 해리성 기억상실은 구분돼야 한다”고 말했다.


해리성 둔주, 과거기억ㆍ인격도 변화

해리성 장애 중 영화나 드라마 소재로 가장 많이 사랑 받는 것은 다름 아닌 ‘해리성 둔주(fugue)’다. 해리성 둔주에 걸리면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사라질 뿐 아니라 인격도 완전히 변해 다른 사람이 된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해리성 기억상실과 비슷하지만 주거지에서 이탈하는 등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해리성 둔주의 특징을 잘 녹여낸 대표적인 영화는 ‘너스베티’. 영화는 평소 병원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남자 주인공에 빠져 있던 여 주인공(베티)이 남편이 살해당하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후 자신이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의 연인이라 굳게 믿고 남자 배우를 만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여행을 떠나 벌어지는 에피소드다.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후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직장을 구하거나 여행을 떠나는 해리성 둔주 증상과 딱 맞아떨어진다.

해리성 둔주의 또 다른 특징은 과거의 가족이나 친구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다시 과거의 가족으로 돌아오면 다른 지역에서 살았던 일 또한 기억하지 못한다. 서 교수는 “서울에서 개인사업을 하던 사람이 부도가 난 뒤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해 가족을 떠나 부산에서 결혼을 하고 살면서 서울에 있는 가족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상태가 바로 해리성 둔주”라고 했다. 영화와 드라마 관계자에 있어 해리성 둔주라는 질환은 너무나 극적이기 때문에 선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나 드라마처럼 아름다운 결말로 끝나는 해리성 둔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업실패, 직장퇴출 등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 해리성 둔주에 걸려 방황을 하다 실종된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김한규 원장은 “갑자기 집이나 직장을 떠나 예정에 없던 여행을 하거나 행방불명이 되는 것이 해리성 둔주”라며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수 년 간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 살인ㆍ폭력 가능성 높아

한 사람 안에 서로 다른 정체성과 인격을 가진 여러 사람이 있는 증상인 ‘해리성 정체감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도 영화나 드라마 소재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영화와 뮤지컬로 유명한 ‘지킬 앤 하이드’가 대표적이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는 과거 다중인격장애로 불렸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투쟁하고 서로 비난한다. 김한규 전문의는 “각각이 이름, 경험, 정체감 등을 갖고 번갈아 지배권을 갖기 위해 갈등하고 서로를 부정한다”고 했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는 영화적 소재로는 안성맞춤일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질환이다. 다중인격 상태에서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면책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프라이멀 피어’는 다중인격 존재 여부를 적나라하게 다룬 영화다. 영화에서는 시카고에서 존경받는 로마 카톨릭 대주교를 살해한 19살의 용의자 애런 스템플러가 다중인격장애라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 받는다. 물론 모든 것은 주인공 애런의 연기였다. 서정석 교수는 “폭력적이고 사악한 내면의 캐릭터가 분출될 가능성이 높아 문제”라면서 “자신은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살인이나 폭력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커 미국 등에서는 연쇄 살인범 등을 다중인격장애로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유아기에 신체적, 성적학대를 받으면 해리성 정체감 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박한선 과장은 “유아기 때 장기간 학대나 트라우마를 경험하면 발생할 수 있고 인격장애가 동반되기 때문에 치료가 어렵다”고 했다. 김한규 전문의는 “환자의 75~90%가 여성인 것이 특징”이라면서 “대개 9세 이전 아동기에 발병하는 만성적 장애라 알려져 있다”고 했다.


참사ㆍ폭력ㆍ전쟁 등 현실 문제의 반영

해리성 장애가 영화와 드라마에서 주된 소재로 활용되고 있는 것은 참사 전쟁 재난 등에 노출돼 개인의 힘으로 사태를 극복할 수 없는 현실 문제를 반영한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현실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해리성 장애가 영화와 드라마에서 소재로 활용되고 있는 것은 현실에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사건과 폭력, 참사가 발생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지적한다. 서정석 교수는 “해리성 장애는 현실을 감당할 수 없는 개인들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극단적 방어기제”라면서 “현실을 감당할 수 없는 개인들이 증가하고 있는 우리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했다.

해리성 장애와 관련, 흥미위주로 흐르고 있는 언론에 대한 비판도 제기됐다. 김한규 전문의는 “언론에서 특히,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부풀려 기사화하는 것 같다”면서 “올 초 포털사이트에 직장 내 다중인격자가 87.2%라는 기사가 올라왔는데 다중인격의 정의를 광범위하게 확대해 마치 직장인의 대부분이 다중인격자인 것처럼 만든 것은 아무리 흥미위주의 기사라도 삼가야 한다”고 꼬집었다. 김 전문의는 “해리성 장애를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가 인기를 끌면 관련 기사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데 정확한 통계나 질환에 대한 이해 없이 흥미위주식 기사로 독자들에게 해리성 장애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치중 의학전문기자 cjkim@hankookilbo.com

전문보기 – 한국일보
https://www.hankookilbo.com/v/54009937d9964926a3b8095373d3b4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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