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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4년(태조3) 중추원상의사(中樞院商議事),1397년 충청도도절제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제 1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定社功臣)1등에 책록되고, 그 후 문하부참찬사(門下府參贊事)에 승진하였다. 1400년(정종2) 도독중외제군사도진무(都督中外諸軍事都鎭撫)로 병권을 장악하여 제2차 왕자의 난에도 이방원을 도왔다. 삼군부참판사(三軍府參判事) 때, 왕명으로 사병(私兵)의 혁파(革罷)가 실시되자 이를 반대하여, 황주(黃州)로 유배되었다. 곧 풀려나 서북면도순문사 겸 평양부윤(西北面都巡問使兼平壤府尹)으로 나갔다.
1405년 우정승(右政承), 1408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고, 이듬해 훈련관도제조(訓練觀都提調)를 거쳐 삼군부영사(三軍府領事)가 되었다.
태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고, 죽은 뒤 태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묘는 연곡리 마을 우측 나지막한 야산 기슭에 위치해 있다. 본래 이 별묘는 고종 5년(1868) 현재의 위치에서 약 150m 떨어진 서북쪽 지점에 위치했던것이나 퇴락이 심하여 1914년 이곳으로 이전, 1949년 곡장 보수, 1973년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고 한다. 건물로는 3문과 본당인 사우가 있다.
1405년 우정승(右政承), 1408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고, 이듬해 훈련관도제조(訓練觀都提調)를 거쳐 삼군부영사(三軍府領事)가 되었다.
태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고, 죽은 뒤 태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묘는 연곡리 마을 우측 나지막한 야산 기슭에 위치해 있다. 본래 이 별묘는 고종 5년(1868) 현재의 위치에서 약 150m 떨어진 서북쪽 지점에 위치했던것이나 퇴락이 심하여 1914년 이곳으로 이전, 1949년 곡장 보수, 1973년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고 한다. 건물로는 3문과 본당인 사우가 있다.
이용안내
입장료: 없음
주차시설: 없음
장애인 시설: 없음
기타 관광정보 및 외국어 안내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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