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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지

역사


회암사는 고려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總本山)이었으며, 조선초에 불교계를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폐합(統廢合)할 때에도 선종(禪宗) 본찰(本刹)로써 크게 번영하였다.

또한 당시 불교계를 사상적(思想的)으로 이끌었던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등의
고승(高僧)들이 주석(主席)한 최고의 가람이다.

회암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기록에 회암사라는 사찰명이 있는 점을 볼 때 12세기에는 창건되었을 것이다.
회암사가 현재의 회암사지와 같은 대규모의 사찰로 중창(重創)된 것은 고려 말에 인도의 고승인 지공이 “회암사의 산수형세가 천축국(天竺國 : 현재의 인도)의 나란타사와 같기 때문에 이곳에서 불법을 펼치면 크게 흥할 것”이라고 하였고, 그 제자인 나옹이 그러한 뜻에 따라 대대적인 불사(佛事)를 이루면서이다. 조선초에는 태조(太祖) 이성계, 효령대군(孝寧大君), 정희왕후(貞熹王后), 문정왕후(文定王后) 등의 왕실인물이 회암사에 대규모의 불사를 단행하여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이 되었다.

1964년에 사적 128호로 지정된 회암사지는 1998년부터 2012년까지 10차에 걸쳐 사찰의 중심권역을 발굴, 조사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회암사는 일반적인 사찰과는 달리 궁궐과 유사한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음이 확인되었고, 왕실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던 도자기류와 기와류 등 귀중한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고려말, 조선초 최대의 사찰로서의 위상과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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